🎠 빼놓을 수 없는 일상/🚙 내 연보를 남기자

입학한 학교의 기억과 졸업한 학교의 기억

토리랑영원히 2023. 9. 10.

 이곳을 쉬기 전 남겼던 이 카테고리 글에서 가만 생각해보니 뭔가 좀 빼먹은듯한 게 있었다. 

그게 1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생각날 줄은 정말 몰랐지. 

지금의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당시 찍었던 사진을 보니 내 기억속에 남아있던 그곳과는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난 경기도 안양에서 유년시절,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내가 입학했던 그 당시 국민학교는 안양이 아닌 영등포 신길동에 위치한 도림국민학교였다. 

지금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변해있겠지만 입학 당시 집이 학교 바로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밥먹듯이 오가던 길이라 기억에 훤하다. 

 당시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또래 친구들과 달리 입학식 때 주변 다른 친구들 부모님들이 우리 가족을 바라보는 눈길도 좀 달랐다. 

 보통 어머니나 아버지가 함께 동행하는 편인데 환갑을 전후한 노인들을 따라 온 8살짜리 아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위 우측 사진을 보면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1미터 남짓한 너무 작은 아이가 이제 초등학생?? 

 

"아이고, 얘가 학교에 들어온 거예요? 아이고, 어쩔까나... 힘들어도 열심히 공부해야지..." 

 

 지나가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날 보면서 격려도 해주셨지만 한편으로는 또래들보다 너무 작은 체구 때문에 학교 생활이 많이 힘들 걸 걱정해주시는 아주머니들이 훨씬 많으셨다. 

 

매일같이 반복되던 아침 체조

 

지금의 초등학교 교육과 비교한다면 교과서 내용도 난이도가 낮았고 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이 처음으로 시작하는 학습이었다고 말하자면... 

 

 "사과같은 내 얼굴, 호박같은 내 얼굴, 쿵작쿵작..."  

 

 수백명의 아이들이 머리부터 팔, 다리를 흔들어대며 각종 율동 아닌 율동을 펼치는 것이 하루 학습의 시작이었다. 

 솔직히 요즘 7~8살짜리 아이들에게 시키면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을 칠만한 행사였지만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집안 환경이 웬만큼 넉넉지 않으면 유치원에 다니는 건 엄두도 못내던 시절. 

 그 때는 학교에 입학하기까지 한글을 모르는 아이들도 꽤 있었고 덧셈, 뺄셈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학교에 입학할 나이면 팝송까지 흥얼거리는 아이도 많은 요즘이지만 그 당시에는 10살 이내의 어린 아이들이 사과같은, 호박같은~~을 합창하며 학교 운동장에서 율동을 한다는 게 유치하다던가 생각할 시대 역시 절대로 아니었다. 

 

7080 유치원생은 부르조아??

 

 요즘은 그 당시의 초등학교 거의 1~2학년 과정까지를 유치원에서 패스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집에서 부모님들이 어느 정도 미리 가르치던가 본인 의지로 패스하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학교에서 처음부터 배우는 방법밖에 없었지만 학교 공부를 하는데 있어 가장 기본인 모국어를 학교에서조차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선생님들까지 애먹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난 중학교 시절까지 학교 성적이 반에서 중하위권이었던데 당시 며칠에 한번꼴로 한글 받아쓰기 시험을 치면 같은 반 친구들중에, 심지어 학급 부장을 맡고 있는 아이들까지도 여전히 30점, 40점을 받는 친구들이 허다했다는 데서 많은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처럼 개성 어쩌구 하면서 어린 아이들의 자기 취향을 존중해주기보다는 어느 정도 다 같은 친구라는 틀을 유지해주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튀는 개인 물품을 학교에 가져오는 것도 제한당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너무 어린 5~7세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은 예외. 

 그 덕분에 아이들을 예쁘게 치장해주고 싶은 부모들도 많았고 유치원에 1~2년 다니는 게 초등학교 6년 다니는 것보다 돈이 더 많이 든다고도 했다. 

 그만큼 유치원 시절의 뽐내기 일상에 젖어있던 아이들은 가끔 국민학교 일상에서도 그 흔적을 보여주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처럼 같은 반 친구들이 어느 한순간 홱까닥 해버리는 일이 잦은 시대에는 자칫 잘못된 표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해선 안될 것의 구분이 지금에 비하면 명확했고 가정교육 역시 철저했던 시절의 혜택으로 그런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대로,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대로 각자의 일상을 살아갔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기본적인 틀에 잘 따르던 아이들이지만 입학 초기, 아직은 겨울의 쌀쌀함이 남아있는 시기에 그 학교 입학 이전보다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서 학교 밖 운동장에서 허구헌날 사과 같은, 호박 같은 쿵작쿵작 해대는 일상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또래 친구들이야 많았지만 아직 또래들이 그렇게까지 포화 상태인 경험을 해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보호자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학교에 왔는데 추위를 무릅쓰고 아침 체조 퍼레이드를 끝내고 나서 이제 집에 가는 건가 싶으면 그때부터가 교실에 입실, 학교 공부 시작이라니... 

 한 체조 또 하고, 한 체조 또 하고 두세번을 반복하느라 거의 한시간은 되는 듯이 지루한 체조 시간이었지만 실제로는 30분 정도 되었으려나... 

 매일 같이 집에서 자유롭게 놀던 아이들을 그렇게 1부, 2부에 맞춰 지긋지긋하게 만들다니... 

 교실에 입실하고 나서는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전혀 기억무근이지만 아침마다 추워죽겠는데 아이들을 운동장에 세워놓고 아침잠을 깨우기 위한 체조 퍼레이드를 이어갔던 시간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전학으로 막을 내린 신입생 체조 퍼레이드

 

 한 달이 채 못되어 우리집은 이사를 했다. 

 내가 지금도 늘 그리워하는 유년시절을 보낸 안양으로 말이다. 

 그 아침 체조가 당시 도림 국민학교만의 행사였는지 모르겠지만 전학한 안양의 학교에서는 체조를 하지 않았다. 

도림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여자 선생님이셨던데 반해 전학을 온 학교에서는 좀 풍체가 있어보이는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셨다. 

 요즘은 각 학교 면접에서도 학생들에게 무서움이나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외모의 소유자는 실격이라고 들었는데 내 기억속 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분은 아니셨지만 체구가 워낙 듬직하신 편이라 요즘 같으면 오인을 사실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이가 어렸던 탓인지, 그 때쯤 서서히 이웃 친구들과 교류하는 법을 익혀가며 눈에 익혀둔 친구들과 갑자기 헤어졌는데도 정들었던 무언가와 헤어지는 게 어떤 건지를 제대로 체감하지 못했다. 

 

실내 수영장을 가진 몇 안되는 국민학교

 

 전학을 온 학교에는 자그마치 수영장이 있었다. 

학교 수영부를 운영하고 있는 학교였던만큼 수영장에 꽤 신경을 썼는데 당시 상급생 누나들이 수영장 물을 쏜살같이 헤쳐나가는 모습은 "Wonderful"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실외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외관을 보강하고 실내 수영장으로 거듭났을 땐 어린 학생들이 보기에 정말 뽀대 하나는 최강이었다. 

 

운동부의 폭력성향에 놀랐던 기억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아침 등교길. 

 바로 그 수영장에서 난리가 났다. 

 수영 연습을 하는데 성적이 좋지 못한 상급생 누나가 담당 코치 선생님께 매를 맞으며 울고 있었던 것. 

 요즘은 그런 행위를 얌전히 당할 학생들도 많지 않을 것이고 당장 사회적인 문제로 번지겠지만 당시는 좀 과하다 싶은 교사들의 체벌이 당연시되던 사회였다. 

 물론 그 코치 교사가 사용한 도구는 속이 텅 빈 플라스틱 파이프라 그리 아프지는 않았겠지만 이른 아침, 몇 백명의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간, 그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 누나가 당했을 수치심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을 거다. 

 

 "수영부에 들어갈 사람 손, 수영부에 들어가면 선생님들이 라면도 끓여줘."

 

 2학년에 올라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의 수영부 입부 권유의 말이 아이들에게 쏟아진다.

 난 애초에 물에 들어가면 가라앉는 체질이라 관심무였고 부내의 상황이 그렇게 다 보여지는데 누가 가입하겠.........................냐고 생각했지만 평소 수영을 좋아하는 아이들 몇몇이 가입을 했다. 

 거기 가서 그 꼴을 당하고 싶냐고, 무섭지 않냐고 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아이들은 다 하더라. 

 요즘도 프로 스포츠계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라는데 그곳에 있는 선수들이나 아이들이나 그런 상황을 다 감내할만큼 자기 꿈을 쫓는 인간의 욕구는 정말 대단해.... 

 그건 그렇고 설마 라면 먹고 싶어서 가입한 애들도 있었던가...??

 워낙 많은 게 빈약했던 시절이니 이해는 간다... 

 

전학 이전 학교에서 한달을 함께 한 친구가 날 알아본다

 

 안양과 영등포는 꽤 먼 지역이니 이전 도림교에서 날 기억하는 친구들과 우연하게라도 재회할 일도 별로 없고 재회한다고 해도 그 어린 시절의 얼굴을 기억할리가 없다는 건 왜인지 모를 서운감이 들 때도 있다. 

 한편으로는 안양 생활 이후 체구도 여전히 꼬마지만 얼굴에 어릴적 모습이 많이 남아있어 나는 상대방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은 나를 기억하는 아이러니한 일도 종종 발생한다. 

 문제는 이와는 달리 거의 있지 않을 것 같은 사건이 몇 년 전에 있었는데 그 때도 어느 커뮤니티 사이트에 맨 위의 사진을 업로드한 적이 있었다. 

 설마 하고 있었는데 도림교 재학 당시 나를 기억하는 같은 반 친구에게서 연락이 온 거다. 

정말 민망하게도 그 친구는 내가 전학한 사실을 모르고 다른 반 어디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도림교를 졸업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더라. 

 보통 전학을 가는 경우는 학년이나 학기의 절반 전후를 마치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어쩌다 나처럼 재학 시기 자체가 불분명하게 부리나케 가버리는 경우, 짧은 시간이더라도 같이 공부하고 놀던 친구들과 재회를 하더라도 반가운 마음에 대한 리액션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표현할 수 없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질 법도 한데 그 짧은 한달 정도의 재학 시간이 기나긴 10여년의 학창시절만큼 똑같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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