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빼놓을 수 없는 일상/🚙 내 연보를 남기자

우리의 일상은 연보의 진행이자 개인 자서전이다

토리랑영원히 2022. 6. 9.

지난 3월말쯤 새 학기를 시작하자마자 한 과목의 교수님이 정해주신 레포트는 나를 무척이나 당혹스럽게 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삶 중에서 특정 시기를 선택해서 연보와 자서전 글을 쓰라는, 다소 쉬운듯 하면서도 사람에 따라서는 참 난감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과제인데 일단은 내가 그렇다. 

이 과목은 한국사에 관련된 과목이라 담당 교수님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현재, 앞으로 일어날 일 모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의 작은 역사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한 의도라고 설명을 하셨지만 적어도 내가 지나왔던 길은 제발 그 길이 역사의 깊은 구덩이 속으로 푹 파고 들어가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더 많았으니 말이다. 

 

 

태어난 직후는 생각날 일이 없고 동생이 태어나기 좀 전이니 한 4~5살 즈음까지는 많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머리는 나빠지는데 어린 시절 일은 오히려 더 생생하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태어난 해를 적고 그 다음 단계를 적으려는데 유난히 그 무렵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과제를 끝내고 난 지금도 과제를 작성하느라 휘저어둔 그 시절 이야기를 잠깐 해보려고 한다. 

나의 4살 시절, 그러니까 1975~1976년 즈음이다. 

그 시절은 요즘만큼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아 누구나 다 힘든 세상이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우리집은 그 범위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오히려 더 선명한 것도 그 시절을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딴따라였다. 

가수들 무대에서 드럼을 쳤다는데 몇 장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런닝셔츠에 낡은 반바지, 드럼이라고 해봤자 요즘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드럼이 아니라 얼핏 보면 녹슬어빠진 기름통처럼 보이는 그것이 바로 그 시절의 드럼이었단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물론 요즘으로 치자면 일의 특성상이라고 많이들 생각하겠지만 아버지는 가정을 책임질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동네에 같이 놀 아이들이 없어 늘 집앞마당에 나가 혼자 놀다 들어오는 게 하루 일과였던 내게 어쩌다 한번, 뜬금없이 집에 찾아와서 엄마를 부려먹는 그 사람 =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하는 존재?? 

그 정도 인식이 전부였고 아버지가 갑자기 집에 들어오시면 반가운 게 아니라 도리어 답답하고 어색함만 감돌 뿐이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언제나 엄마와 단둘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생활비를 제 때 가져다 주는 게 아니어서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이 일을 한다는 게 상상하기 힘든 당시 상황으로써는 유치원에 다닐 나이인 내게도 그리 녹록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딘가에 놀러다닌 기억은 있는데 엄마에게 물어보면 옆집에서 가는 길에 우리도 데려간 것이었단다. 

요즘은 어디 가까운 곳에 놀러 가려고 해도 주머니에 뭐가 있어야 되는 세상이지만 당시는 그냥 가까운 산에 도시락 싸들고 다녀오는 것도 일상 속의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우리집은 그마저도 쉽지 않은 형편이라는 것을 아는 이웃집에서 종종 엄마랑 내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함께 동행해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나랑 마주 앉은 여자아이는 나보다 한두살 위 누나뻘 같은데 지금 어디서 뭐하려나... 

 

 

이맘때가 내가 기억하는 첫번째 정식 가족여행이다. 

우리 할아버지랑 할머니 두분 모두 50대때... 

요즘 50대랑 비교하면 한 70대로 보일만큼 너무 나이들어보이시지만 저때만 해도 표준 50대였다. 

늘 밖으로만 나돌고 제 갈길을 못잡는 아버지를 바로 잡기 위해 그리도 애를 쓰셨는데 두 분 다 끝내 그 원을 못 이루셨다. 

할아버지는 그런 거 그냥 내버려두라고 만류하셨지만 그래도 아들이니 그런 아버지가 잘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할머니가 몰래 몇 년만에 우리집을 오셨었는데 몇 년 사이에 내가 태어나서 방 안에 앉아있어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으셨다더라.. 

이 때부터 두분은 자신들의 안위를 뒤로 하고 두 손자에게 어머니, 아버지 역할까지 자처하시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셨다.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까지만 해도 다른 할머니들과 비교해서 꽤 듬직한 느낌이셨는데 젊으실 때부터 워낙 약만 먹으면 뭐든 다 되는 줄 알고 혈압약, 위장약, 관절염약, 심장약.... 좌우지간 매끼니마다 약을 한주먹씩 드시는 분이었다.

그 때부터 약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다른 요법을 찾아봤어야 했는데 그래도 몸생각하시느라 모처럼 지어드신 한약이 다른 약이랑 꼬여서 위장이 기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는 바람에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맨밥에 풀처럼 녹을 정도로 찐 호박 정도 이외에 다른 음식은 일체 드시지를 못했다.  

 

 

위에 계신 분은 김포에 사신다고 해서 늘 김포 할머니라고 불러드렸던 이모 할머니다. 

우리 할머니가 1남 3녀중 막내이셨는데 그중 제일 큰 언니 할머니시다. 

다른 남매들은 모두 결혼을 잘해서 노후를 마음 편히 보내셨는데 유독 우리 할머니는 시집오시자마자 하던 가게 망하고 다시 좀 일어설만하니 6.25 터지고 피난 오셔서 다시 가게를 시작했지만 또 망하고... 

그러다 평생 허리가 휘게 밭일만 하셨다. 

김포 할머니나 그 아래 이모 할머니에게는 시집오시기 전까지 가족 사랑을 독차지하던 귀한 막내 동생이었는데 자신들은 편한 노후를 보내고 있음데도 그렇게 귀하게 자란 막내 동생이 몸이 부서지게 힘들게 살고 있으니 늘 그 모습이 눈에 밟혀 틈나는 대로 우리집에 오셔서 할머니의 안부를 확인하고 가시곤 하셨다.  

 

 

그러고보니 저기가 어디였더라.. 경복궁?? 창경원?? 지금은 창경궁으로 바뀌었던가.. 

요즘처럼 이런저런 요란한 탑승기구 따위 없어도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여행의 즐거움을 막 알아가던 그 시절이다. 

저 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듯한 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할아버지랑 할머니, 두분이 만들어주시는 새로운 일상의 즐거움에 젖어있던 시기. 

이 기억을 지나 다음 연보로 넘어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저 때의 아무 것도 모르는 행복감에 젖어있느라고 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