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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입학 직후 우리 가족 풍경

토리랑영원히 2022. 6. 13.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에는 기쁜 일은 물론 슬프고 폭풍 같은 일까지 우리집에 세찬 일들이 많은 시기였다. 

극단 따라다니면서 드럼친다고 헛구름 잡으러 다니는 아버지를 휘어잡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할아버지.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도 없이 다투기 일쑤였고 어머니는 몇 번인가 친정집으로 피신을 가셨던 기억이 있다.  

 

 

아예 소식을 끊고 가출한 것이 아닌 쉽게 말하면 별거였다고 해야 하나. 

아버지 혼자 우리 둘을 어떻게 책임질지 눈앞에 뻔히 보였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설득으로 아버지와 우리 형제는 이 무렵 할아버지, 할머니랑 함께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기억 속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부모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희생을 자처하시는 분들이었으니 저 때부터 이미 나이든 아들에다 그 아래로 딸린 두 손자를 부양하느라 자신들의 노후를 모두 뒷전으로 내던지신 셈이다. 

 

 

할머니를 기준으로 좌측이 나, 우측이 동생이다. 

우리 둘의 나이 차이는 4살인데 반해 이 때부터 이미 동생은 나보다 덩치가 컸다.  

나는 동생이 태어나기 직전 별의 별 잔병치레를 다해가며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다고 한다. 

지금도 또렷하게 남은 기억중 하나가 4살도 안된 꼬마가 이러다간 정말로 죽겠다 싶을 만큼 허구헌날 미치도록 기침을 했었는데 그게 폐렴이었단다. 

 

 

그러다 보니 병이랑 사투를 벌이느라 체력전에서 밀리다 보니 난 유아기에 거의 자라지를 못하다가 병이 낫고 나서야 다시 정상으로 자란 셈인데 학교에 입학할 즈음 8살인 나와 4살인 동생이 저 정도 차이가 났다. 

내가 이마 정도 높이만큼 크지만 덩치는 동생이 더 좋다. 

참고로 학교에 입학할 때 내 키는 당시 통지표에 적힌 대로라면 99cm였다....... 

그런데 동생은 이 사진을 볼 때마다 가끔 불만을 터뜨린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태어나고 나서 첫 아이라 쥐뿔도 없는 상황에도 이런저런 사진이라도 남겨두고 컸지만 동생이 태어날 무렵에는 가뜩이나 한끼 식사도 제대로 챙겨먹기 힘든 형편이라 정말 아무 것도 남겨둔 게 없었다고 한다. 

 

 

"형은 어릴 적 사진도 많이 있는데 난 왜 하나도 없어..."

 

그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맘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동생의 그런 불평을 해소해주어야 하는 미션까지 떠맡으신 셈. 

 

 

상대적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두분은 나와 사진을 많이 찍으셨지만 모처럼 눈에 띄는 동생과 할머니의 사진이다. 

동생은 매사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반항적이고 버럭거리는 성질을 타고난 편이어서 자라면서 할머니께도 단 한순간도 고분고분하지를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한건 우리 곁을 마지막까지 지켜주신 보호자였던 할머니가 마지막 길을 가실 때 마지막 길을 지켜준 게 바로 내 동생이었다는 거다. 

난 지금도 하루에 열두번도 더 저 웬수와 따로 떨어져 살 구실을 찾아내느라 별르고 있지만 어느 한 순간 갑자기 할머니가 떠오른다.

그렇게 웬수같이 자신의 속을 터뜨린 작은 손자였지만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큰 손자인 나보다 더 가까이서 지켜주었던 작은 손자가 못내 기특하셨는지 내가 저 웬수 때문에 열받을 때마다 나도 못지켜드린 할머니 곁을 저놈이 지켜드렸던 기억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차지한다.

생전에 늘 우리 둘은 어딜 가나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시더니 내가 울화가 터질 때마다 한번씩 순간적으로 내 기억을 비집고 들어오는 할머니는 여전히 무슨 일이 있든 저 웬수랑 내가 함께 하기를 원하시는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지나 맞이했던 할머니의 환갑잔치. 

할아버지가 할머니보다 연세가 몇 살 위시니까 먼저 치르셨을텐데 할아버지 환갑잔치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안봐도 뻔하지만 그렇게 바깥으로만 돌아다닌 우리 아버지가 할아버지 환갑을 챙겨드렸는지 여부는 확신이 안서고 이때 할머니 환갑잔치도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준비 다 하시고 이모 할머니랑 친척들이 거의 다 준비해주신 걸로 기억한다. 

물론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몸으로 떼우긴 하셨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만큼 정말 복없이 살다 간 분들도 찾기 힘들겠다... 

 

 

그 때는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안양에 있는 어느 보육원 안에 있는 빈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셨고 그 보육원 안에 있는 빈 집을 두채 임대했는데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아랫집, 우리는 조금 언덕을 올라가면 보이는 윗집에서 살았다. 

지금 위의 사진은 할아버지랑 할머니 집 앞마루다. 

앞마루라고 해봐야 방문을 열고 나오면 저렇게 노인 한분이 앉아도 폭을 다 차지하게 되는 작은 마루였는데 요즘같은 여름에는 그 마루 바닥이 시원해서 뒹굴거리던 기억이 난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아마 집 주변 어디쯤이었을텐데 역시나 우리 할머니 사진으로 마무리한다. 

우리 할머니는 지난번에도 얘기했는지 모르지만 워낙 약만 믿고 사신 분이라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심장약, 위장약, 관절염약, 혈압약 등등 매끼니마다 약을 한주먹씩 드셨다. 

그외에도 자신의 몸이 건강해야 우리 둘 오래오래 챙긴다고 나름대로 몸보신용으로 한약을 지어드신 적이 있는데 평소에 워낙 드시는 약이 많다보니 한약과 양약이 뱃속에서 충돌을 일으켰는지 위장 기능이 완전히 상실돼서 뭘 드시기만 하면 속이 편안한 날이 거의 없어 이런저런 맛있는 걸 아무리 앞에 갖다 놔드려도 제대로 드시지를 못하고 묽게 끓인 밥과 물에 씻은 김치, 그리고 찐 호박 정도가 식사의 전부였다.

그 후유증으로 90년대로 넘어올 때쯤엔 허리를 거의 펴지 못할 만큼 골다공증도 심해지시고 다른 할머니들에 비해 뒤처지지 않던 체격도 살이 다 빠져서 앙상한 뼈만 보일 정도였다. 

 

요즘 꿈에 가끔 할머니가 나타나시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저 보육원, 저 집앞에 내가 서있고 그 집 마루에 할머니가 앉아계신다. 

다른 게 있다면 꿈속의 저 집은 바람만 좀 세게 불어도 무너질 듯한 폐가가 되어있는데 머리도 하나도 정리가 안된 초췌한 모습으로 할머니가 그 앞에 앉아계시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내가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생각에 그런 꿈을 꾸는 거라면 이왕이면 한참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해하던 그 시절의 할머니 모습이면 좋을텐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우리 두 형제를 못내 안타까워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내 꿈에 투영된 게 분명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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